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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축구의 '기억 속 메카', 스타디움 메르데카

2010-02-22 오전 9:22:00 양정훈

(베스트일레븐)

번화가 부킷빈탕에서 도시의 스카이라인 사이사이를 비집고 오가는 모노레일에 몸을 실은 지 불과 10여분. 어느새 창 밖 풍경은 빼곡한 회색 빌딩지대에서 듬성듬성 푸른 숲이 드러나는 한적한 장소로 바뀐다.

성지를 찾아가는 들뜬 마음이 평정을 찾은 것도 순간, 쇠락의 애잔함마저 고풍스런 역사의 흔적으로 간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기대가 미묘한 안타까움으로 변했다. 하지만 같은 자리에 같은 모습으로 한창 복원공사중인 스타디움 곁에 서서 이렇게라도 맞이하는 것을 행운으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게 만드는 우여곡절 이야기를 듣노라니 이내 경외심은 환원됐다. 2007년 여름, 아시안컵이 열리던 기간동안 방문했던 말레이시아 ‘스타디움 메르데카’의 첫 인상은 이랬다.

▲ 양정훈의 성지순례
아시아 축구의 '기억 속 메카', 스타디움 메르데카


말레이어 ‘메르데카’는 우리말로 ‘독립’을 뜻한다. 영어로 치면 ‘Independence’나 ‘Nationhood’에 해당하는데, 영어를 마치 공용어처럼 널리 사용하는 말레이시아 사람들이 선호하는 낱말은 ‘Nationhood’인 듯하다.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한지 50년 되는 뜻 깊은 2007년을 맞이해 정부가 여러 행사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내건 캐치프레이즈 또한 ‘Nationhood, 50 Years Anniversary’였다. 독립과 동시에 말레이 반도 끄트머리에 있던 여러 주(State)와 연방자치령(Federal territory)이 함께 연방정부를 구성해 주권국가로서의 ‘지위를 획득’한 의미를 강조하기에는 ‘Nationhood’가 보다 적합해 보인다.

1957년 말라야 연방(1963년 탄생하는 말레이시아의 직접 전신)이 출범하는 첫 해부터 독립을 기념하는 축구잔치 ‘메르데카컵’이 개최됐다. 실상 지난 세기 중반을 갓 지나쳤을 무렵은 아시아 전반을 아우르는 변변한 국제축구대회가 많지 않은 시기였다. 그 와중에도 쿠알라룸프르에서는 매년 ‘메르데카컵’이 성황리에 열렸다. 말레이시아는 이를 구심점 삼아 한때 아시아 축구의 메카 노릇을 하기도 했다. 세계 축구계 주류와 격차를 보이며 소외될 수 밖에 없는 약소국이었지만, 적어도 아시아에서는 맹주를 자처하던 나라들이 8월 한여름(2월에 열린 특별한 경우도 있음) 말레이시아의 독립기념일에 즈음하여 그들의 수도로 모여들었다. 적어도 1970년대 중반까지는 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토너먼트 중 하나인 이 대회에서 우승한 팀이 사실상의 아시아 패자로 대접받는데 큰 흠집 없었다.

대한민국은 유독 ‘메르데카컵’과 유쾌한 인연을 맺고 있다. 1960년 제4회 대회에서 말라야 연방과 공동우승을 차지한 것을 필두로 A대표팀이 마지막으로 참가한 1978년까지 무려 8번 챔피언트로피(공동우승 3회 포함)를 거머쥐었다. 당시 대회 타이틀을 향해가는 중요한 길목에서 한국과 빈번히 만나 겨루던 라이벌은 주최국 말레이시아였다.

대회에 임하는 말레이시아 선수들에게는 홈 어드벤티지 이상의 강점이 있었다. 오랜 영국 식민지 생활을 겪으며 본고장의 선진축구를 이른 시기부터 흡수해 자신들의 것과 접목하며 적잖은 발전을 이뤘었다 그러나 말레이시아 축구는 자기 오류에 발목 잡혀 아시아 축구의 발전상을 뒤따르지 못했다. 1980년대, 오래도록 곪아왔던 오류의 종기가 터졌다. 도박과 연루된 불미스러운 승부조작 의혹이 연이어 진실로 밝혀졌고 팬들은 차츰 등을 돌렸다. 게다가 날로 치솟는 유럽축구리그의 인기는 안 그래도 꺼져가는 국내 축구열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말레이시아 축구는 몰락해갔고 이와 맞물려 메르데카컵의 권위와 위상도 실추됐다. 창설이래 1988년까지 30년이 넘도록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치러지던 대회가 급기야 1980년대 후반에 이르러 일정한 주기성 마저 잃었다. 지금까지도 근근하게 대회의 명맥이 이어져 오지만 명성은 바랜지 오래다.

그래도 대회의 전성기였던 1970년대 중후반까지를 돌이켜 보면 아시아 각국이 축구를 통해 서로 격렬히 경쟁하며 실력증진을 꾀했을 뿐만 아니라 공통의 어두웠던 제국주의 역사를 뚫고 새 시대를 향해가는 당찬 신념에다 자존심마저 더해진 긍지를 겨루던 뜨거운 장이 ‘메르데카컵’이었다. 그리고 그 결전의 무대가 바로 ‘스타디움 메르데카’다.

경기장이 완성된 것은 1957년 8월21일이고 열흘 후, 바로 그곳에서 말라야 연방은 수만 군중이 자리한 가운데 영국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국이 되었음을 선포했다. 스타디움은 자연스레 ‘메르데카’로 명명됐다. 초기에는 단층스탠드만 있어 2만 명 남짓을 수용할 수 있었으나 ‘메르데카컵’을 비롯해 규모가 큰 여러 국내, 국제 스포츠 이벤트를 유치하면서 그 몸집을 4만 5천석까지 키웠다. 하지만 정교한 플랜 없이 덩치를 불리는 데만 급급한 나머지 본부석 맞은편과 양쪽 골대 뒤편에는 볼썽사나운 2층 스탠드가 생겼다.

세월이 흐르고 스타디움도 낡았으며 스타디움이 자리한 지역도 짙은 도심의 색조를 띠게 되자 경기장의 확장성에 문제가 생겼다. 1998년 영연방경기대회(Commonwealth Games)를 유치하기 위해서는 더욱 큰 경기장이 필요했는데 기존의 ‘스타디움 메르데카’를 증축하기에는 여러 제약이 따랐다. 이에 말레이시아 정부는 시 외곽에 스포츠 시설단지를 조성하기로 결정했다. 그 계획의 일환으로 지역 이름을 딴 9만석 규모의 종합경기장이 신축되는데 바로 ‘부킷 자릴’이다. 새로운 경기장이 생기면서, 1957년 1회 대회부터 1995년 32회 대회까지의 ‘메르데카컵’이 펼쳐졌던 ‘스타디움 메르데카’는 그 역할과 내셔널 스타디움으로서의 지위를 ‘부킷 자릴’을 위시한 현대적인 스타디움들에게 이양했다. 말레이시아 새 역사의 첫 페이지가 쓰여졌던 살아있는 유적으로 한 발짝 물러서는 것처럼 보였다.

‘메르데카컵’의 명맥은 새롭지만 낯선 경기장에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긴 하다. 그러나 무시무시한 개발의 논리를 앞세운 상혼은 중심상업지구 인근 금싸라기 땅을 거대하게 차지하는 ‘역사적 괴물’을 용인하지 못했다. 1990년대 말 정부로부터 ‘스타디움 메르데카’의 부지 재개발권을 획득한 민간기업은 대중들의 격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독립 유적지’를 파괴해갔다. 이 일대를 사무기능이 포함된 복합위락시설로 채워 넣으려는 심산이었다. 하지만 시절의 운(運)은 ‘메르데카’의 편을 들어줬다. 1990년대 말 아시아 전역을 강타한 금융위기가 말레이시아의 경제중심 쿠알라룸프르만 빗겨갈 리가 없었다. 재정 위기에 봉착한 개발기업은 일손을 놓았았고 ‘전소’의 위기를 가까스로 모면한 ‘스타디움 메르데카’는 국가의 새 시대를 알린 역사적 현장으로서의 중요성을 뒤늦게나마 인정받아 2003년 국가사적으로 지정됐다.

2007년, ‘스타디움 메르데카’는 ‘Nationhood’ 50주년을 맞아 다시금 큰 조명을 받았다. 말레이시아 정부는 방치됐던 낙후 시설들을 대대적으로 손보기 시작했는데 신축에 가까운 보수였으며 처음 완공 당시의 모습과 규모로 되돌리는 복원이었다. 볼품없는 2층 스탠드는 모두 자취를 감췄고 낡은 좌석도 모조리 치워졌다. 찾아간 순간에도 여전히 공사 중이었다. 처음 찾은 순례객이 오래된 정취를 느낄 수 대상은 메인스탠드 입구가 있는 본부석 쪽 건물의 외곽뿐. 이마저도 곧 있을 새 단장을 준비하려는 듯, 방음방진막으로 얼굴을 감싸고 있었다.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질 뻔 했던 위기일발의 이야기를 듣노라면 아시아의 축구성지를 이렇게나마 맛볼 수 있는 것 자체가 진정 행운임이 분명했다.

글,사진=양정훈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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