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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지양명(立地揚名),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2010-02-26 오후 4:43:00 양정훈

(베스트일레븐)

세상이 보다 정밀해져서 더욱 미세한 도량형이 마련되고 한층 세세한 법규가 갖추어진들 ‘인간가치’의 우월성을 논하는 문제에 마주친다면 결코 해답을 내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가식적으로 혹은 겉으로 무엇이든 평등함을 추구하는 지금의 인간세계에서는 영원히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간가치’가 겨루어 승부를 낼 수 있는 대상으로 치환되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진다. 자신의 온전함을 담은 ‘가치’, 이른바 ‘아이덴티티’를 그대로 축구팀에 투영해 대결에 임해 본 사람이라면 승리가 가져다 주는 쾌감을 단순히 스코어차이와 같은 경기 내적 요인으로만 설명할 수 없음을 쉽게 깨닫는다.

상대방을 짓이겨 누름으로써 나의 ‘아이덴티티’가 월등함을 간접적으로 증명하는 일. 이는 금기를 부수는 극락의 기쁨이요, 나의 팀을 정하고 충성을 다하며 언제나 목청껏 응원의 목소리를 내지르는 이유이며, 어떤 이들에게는 삶 그대로의 지향점이다. 이래서 축구는 더 재미있고, 끊을 수 없는 대상이다.

▲ 양정훈의 성지순례
입지양명(立地揚名)-산티아고 베르나베우


굳이 치환대상이 ‘축구’여야 할 이유는 없겠으나 인류의 보편적 선택에 근접한 항목이므로 이에 대해서는 논외로 하고 먼저 한 축구팀의 ‘아이덴티티’를 결정하는 요소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국가대표팀의 경우라면 이야기가 쉽게 풀려나간다. ‘선수’와 ‘팬’이 ‘국가’라는 테두리 안에서 ‘민족’ 혹은 적어도 ‘국적’이 담보하는 최소한의 긴밀한 ‘아이덴티티’로 묶여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고 이를 국가대표팀이 말 그대로 대표하기 때문이다. 프로의 경우 클럽의 선수들과 팀 사이의 연결고리는 대부분 금전이다. 클럽팀을 꾸리는 것은 ‘인간가치’를 보태 융합할만한 선수를 모은다기 보다는 그 우월성을 입증하는데 유용한 도구를 돈을 지불하고 구입하는데 가깝다. 따라서 클럽팀의 ‘아이덴티티’는 지지하는 수많은 팬들의 ‘아이덴티티’ 합에서 구하는 법이 옳다.

그런데 클럽축구의 역사가 짧고 리그 기반이 미약한 우리나라에서는 새로운 프로 클럽이 처음부터 거창하게 만들어질 때 되려 먼저 스스로 독창적이라 주장하는 ‘아이덴티티(지역연고 등)’를 전면에서 적극적으로 제시한다. 그 후 동조하는 성향의 팬들을 끌어 모으는 시도도 게을리 하지 않지만 왠지 늘 수월치 않아 보인다.

서구 축구선진국들의 클럽들을 돌이켜보면 시작이 자생에 근접하다. 배후 의도가 있고 없음을 떠나 창단할 때 넌지시 제시하는 ‘아이덴티티’의 실마리도 작위적이지 않다. 가장 흔한 케이스의 실마리는 보금자리의 설정이다. 즉, ‘어느 지역(도시)에 근거를 두고 경기를 하는가’, ‘홈 경기장이 어느 곳에 위치했는가’가 자연스럽게 모여드는 팬들의 어떠함을 결정하는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지금과 같이 편리한 교통체계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유럽 축구리그 태동기 무렵, 특정 클럽의 지지자들은 대다수 홈 구장이 위치한 지역의 동네 사람들이었다고 보아도 무리가 없다. 팬들의 ‘(지역연고의식을 포함한)아이덴티티’가 한데 섞여 클럽의 그것을 확고히 해나가고 다시금 팬들을 끌어당기는 인력으로 작용하는 순서의 프로세스인데 우리네 실정과 상반된 면이 있다. 스페인의 경우도 지척의 사람들이 제 발로 모여든 건 마찬가지였다.

산업혁명의 중심지역할을 하며 대도시들이 성장해 갔던 카탈루냐나 바스크와는 달리 왕궁과 중앙정부부처들이 몰려있던 마드리드는 19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인구가 갓 50만이 넘는 크지 않은 도시였다. 외교관을 제외하고는 외국인도 많이 없었고, 내륙에 자리해 다른 나라와의 축구 교류도 드물었기 때문에 마드리드에서 축구는 그다지 인기 있는 스포츠가 아니었다. 1920년 앤트워프 올림픽, 대표팀을 처음으로 꾸린 스페인은 올림픽 축구경기에참가해 은메달을 획득하는 큰 수확을 얻었다. 그런데 대표팀의 주축선수들은 모두 카탈루냐와 바스크 출신이었고 축구가 융성하지 못했던 마드리드 출신은 단 한 명도 없었다. 하지만 올림픽 직후부터 마드리드에도 본격적인 축구의 바람이 불어왔다. 이 지역을 연고로 한 클럽들이 갖는 홈 경기를 직접 현장에서 지켜보는 팬들도 점점 늘어갔다.

그 중에서도 돈 후앙 왕자를 열혈팬으로 확보한 레알 마드리드(1920년 레알 칭호를 얻기 전까지는 마드리드 F.C.)의 관중수가 가장 급격하게 증가했다. 클럽창단 초기 경마장, 투우장 등을 전전하며 피치 주위에 두른 임시 난간으로 관중석을 구분해 팬들을 맞이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한때 사이클경기장을 약간 손보아 사용하기도 했으나 역부족인건 마찬가지였다. 당시 클럽의 회장직을 맡고 있던 파라헤스(Pedro Parages)는 카탈루냐, 바스크 등 지역의 팀들과 경쟁하게 될 밝은 미래를 널리 내다보고 구장 신축을 결정했다.

하지만 재정 상태가 넉넉지 못했고 은행 대출로 상당부분 건설자금을 조달해야만 했기에 확보할 수 있는 경기장 부지가 시 외곽 카스테야나 대로가 북으로 멀리 이어진 공터에 지나지 않았다. 1924년 짧은 공사기간을 거쳐 마침내 황량한(?) 벌판 속 경기장이 완공됐다. 4천여 좌석, 입석을 포함하면 최대 1만5천여 명을 수용하는 이 구장의 정식명칭은 ‘캄포 델 레알 마드리드(Campo del Real Madrid)’였지만 지역이름을 따 ‘차마르틴 경기장’이라 부르곤 했다.

이 경기장은 레알마드리드 클럽의 성공적인 역사에 디딤돌이 되었다. 마드리드지역의 다른 여러 클럽들, 이를테면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당시 애슬레틱 데 마드리드)등은 1919년부터 베예카스지역의 메트로폴리타노 경기장을 함께 사용했는데 이는 클럽의 독창성을 훼손하는 장해물이었다. 비록 도심에서 떨어져 외진 곳이지만 아담한 독자 경기장을 가진 레알 마드리드의 차별화된 매력은 팬들의 구미를 당겼고, 지역 최고의 인기팀으로 거듭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관중석을 증설하는데 한계에 이르자 이에 1947년 기존 경기장의 서쪽 변에 연하여 같은 이름의 새로운 ‘차마르틴’을 세웠다. 2만7천여 좌석, 입석 수용인원까지 더하면 7만이 넘는 규모의 초대형 경기장이 탄생한 것이다. 1955년 클럽에 헌신적이던 회장의 이름을 따 ‘산티아고 베르나베우’로 개칭했는데 우리에게도 레알 마드리드의 홈 구장으로 익히 알려진 명칭이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는 비교적 짧은 간격을 두고 끊임없이 내부, 외부 모두 리모델링 됐다. 입석은 점차 사라졌고 외곽의 풍채는 고상함을 더해갔다. 1982년 스페인 월드컵을 앞두고는 대대적으로 개축되었는데 변화의 가장 큰 특징을 관중석의 3분의 2이상을 덮는 지붕이 생겼다는 점이다. 더불어 남쪽, 북쪽 스탠드의 상단 중앙에 현대적인 전광판까지 갖추게 된 마드리드의, 나아가 스페인의 대표경기장인 이곳에서 서독과 잉글랜드의 일전, 홈팀 스페인의 2경기를 포함해 결승전까지 도합 4번의 월드컵 경기가 열렸다.

월드컵 후에도 크고 작은 개축이 끊이질 않았는데 지금의 모습과 가장 유사한 골격을 갖춘 때는 1988년 이었다. 자리를 불문하고 스스로를 레알 마드리드 골수팬이라고 자랑스럽게 소개하는 스페인의 유명 건축가 안토니오 라멜라의 솜씨였다. 라멜라는 경기장을 지칭할 때 혼용하는 여러 용어들에 대해 명확한 정의를 내리기도 했다. 그에 따르면 트랙을 포함한 다목적 경기장은 ‘스타디움(Stadium, Estadio)’으로 축구전용경기장은 ‘캄포(Campo, Campo de futbol)’라고 구별해 불러야 한다는 것. 물론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의견은 아니지만 참고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따를만하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가 애착을 가진 레알 마드리드, 지금 그 홈 경기장의 정식명칭인 ‘산티아고 베르나베우’를 앞에서 수식하고 있는 단어는 ‘Estadio’이다.

사실 ‘레알 마드리드’의 ‘아이덴티티’를 연상해볼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왕가의 귀족적 이미지와 중산층 이상의 부유한 자들의 심상이다. 보통 이렇게들 인식하는 ‘레알’팀 ‘아이덴티티의’ 근원은 무엇인가? ‘레알(Real, Royal)’이라는 이름이 주는 중압감도 상당해 보인다. 하지만 고귀해 보이기만 하는 ‘레알’ 호칭은 꽤 흔하다. 라 리가를 필두로 적어도 프로 리그라고 대접받는 하위리그를 통틀어 ‘레알’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은 팀이 족히 20개는 넘는다. 클럽의 부흥 초기 왕자를 열혈팬으로 흡수 했다는 이유만으로 지금까지도 귀족적 ‘아이덴티티’가 이어져 내려져 올 것이라 주장하는 것은 억지스럽다. 수만, 수십만의 팬을 자랑하는 클럽, 그 ‘아이덴티티’에 수십 년 전 일개팬이었던 왕자가 보탠 기여분은 미미하다. 마드리드라는 연고도시가 가진 통치와 행정의 기능이 지금의 ‘아이덴티티’를 형성하는데 포괄적인 바탕이 되었음은 분명하다. 통치와 행정 기능의 실무를 담당하며 마드리드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레알’주위로 많이 몰려들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하지만 이만으로는 설명이 미흡하다. 같은 마드리드를 연고로 하는 아틀레티코는 서민과 노동자의 팀으로 대변되기 때문이다.

‘레알’과 ‘아틀레티코’의 ‘아이덴티티’를 가르는 여러 큰 요인 중에 여기서 언급하고 싶은 점은 바로 보금자리, 즉 경기장의 구체적인 입지다. 실력을 뽐내며 많은 팬들을 흡수해가던 또 하나의 마드리드팀 ‘아틀레티코’는 지역의 여러 클럽이 함께 사용하던 좁은 메트로폴리타노 경기장을 떠나 마드리드 남부 만사라네스강에 인접한 공업지대에 새로 지은 ‘빈센테 칼데론’에 둥지를 틀었다. 1960년의 일로, 원래 가스공장이 있던 자리였다. 공업지대의 노동자들과 인근에 거주하는 서민들이 ‘빈센테 칼데론’에 운집하기 시작했고 팬이 되어 팀 ‘아이덴티티’의 일각을 본격적으로 이루어 나갔다. 이에 ‘아틀레티코’는 서민과 노동자의 팀이라는 확고한 ‘아이덴티티’를 획득한다.

반면 ‘레알’의 홈 구장이 있는 도시 북쪽의 차마르틴 지역은 경기장이 처음 세워질 무렵에는 벌판의 공터에 가까웠다. ‘도시가 확장되면 개발되겠거니’하는 예측조차 섣부르게 취급 받는 시기도 있었다. 하지만 경기장의 입지를 선정한 파라헤스회장에게 선견지명의 혜안이 있었는지 첫 ‘차마르틴 경기장’이 세워진 이래 85년여가 지난 지금, ‘산티아고 베르나베우’가 위치한 지역은 오래도록 끊임없이 개발의 조류에 편승해 마드리드 최고의 금싸라기 땅으로 변모했다. 고위 관공서, 대기업의 사무실들이 빼곡하고 호화로운 주택들이 즐비한 마드리드판 ‘강남’. 자연스레 ‘레알’의 팬이되어 ‘레알’의 ‘아이덴티티’를 형성하는데 주축을 이룬 사람들은 대부분은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주변을 생활의 주무대로 삼는 유복한 이들이었다. 지역색이 변함에 사람도 바뀌었고 이와 맞물려 팀이 지금 가진 ‘아이덴티티’를 꾸려온 것이다.

따라서 결정체 ‘레알 마드리드’또한 ‘고급스러움’이라는 높은 품격을 지닌 팀으로 세상에 각인되었다. ‘아이덴티티’를 디디고 일어서 실제로도 ‘있는 자들’을 팬으로 거느린 ‘레알 마드리드’는 풍족한 금전적 서포트를 밑천으로 유수의 선수들을 발굴, 육성, 영입하여 실력면에서도 독보적인 고매함을 자랑했다. 이는 다시 팀의 ‘아이덴티티’로 반영되고 매력점으로 작용해 팬들을 불려나가는 식의 선순환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넉넉한 곳간의 인심이 가져다 주는 긍정적 변화의 혁신이 끊이지 않는 그곳, 변변한 교통편도 채 마련되지 못했던 시절의 기억은 이미 오래 전 이야기다. 시 중심을 관통하며 이어진 지하철 10호선이 친절하게도, 경기장 이름과 같은 고급스러운 거리의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역에 순례객을 실어다 준다. 잘 자리잡음으로 이름과 세를 오래도록 떨치고 고유의 ‘아이덴티티’를 확고히 하며 영화를 누리는 ‘입지양명(立地揚名)’의 본보기를 마드리드에서 보았다.

글,사진=양정훈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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