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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마가 수호하는 인니(印尼) 축구의 본거지, 겔로라 붕 카르노

2010-03-19 오후 1:48:00 양정훈

(베스트일레븐)

양정훈의 성지순례
인니(印尼) 축구의 본거지, 겔로라 붕 카르노


‘2022년 인도네시아에서 월드컵을!’
가당찮은 소리로 들릴지도 모른다. 월드컵이라는 대회를 개최하려면 경제여건, 정치적 역학관계 등 여러 복잡한 사항이 얽혀 만들어진 이미지가 20여명 남짓 FIFA 집행위원 중 적어도 과반이상의 입맛에 꼭 맞아야만 한다. 하지만 인도네시아의 물리적 현실이나 외교적 역량을 고려해 본다면 사실상 실현 불가능한 이야기에 가깝다. 보다 유리한 조건을 가진 유치 경쟁자가 그만큼 많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가정에 불과하나 월드컵 개최선정 기준의 최우선 조항이 국내외를 아우르는 ‘축구열기’라면 아시아에서 지구촌 최대의 축구축제가 열려야 할 곳은 단연코 인도네시아다.

그네들의 ‘광기’에 가까운 ‘축구바라기’ 열정을 느껴본 적이 있다면 이 같은 가정에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일 터이다. 이따금 브라운관 너머로 전해지는 인도네시아 축구리그의 뜨거운 열기는 공간의 제약성 때문에 다소 비현실적인 이질감으로 다가올 때가 있다. 그러나 실제 현장의 분위기를 맛본 후라면 더 이상 그네들의 ‘광기’가 거북하지 않을 것이다. 지난 2007년 아시안컵 때 대한민국이 적진의 한가운데 자카르타에서 김정우의 중거리 슛 한방으로 인도네시아를 1-0으로 격파하며 홈팀의 8강 진출을 좌절시켰던 날의 기억이 지금도 쾌쾌한 냄새와 함께 생생히 피어오른다. 홈팀의 패배가 8만여 팬들을 폭도로 바꾸어 놓지는 않을까 염려됐지만, 잠시 이런 생각을 했던 것이 미안했을 정도로 그들은 수준 높은 관중매너를 보여주었다.

미친 듯이 축구를 흠모하는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인도네시아에서 이 정도의 에피소드는 다반사다. 방문하기 전까지만 해도 생경하기만 했던 나라, 그곳 인도네시아의 놀라운 ‘축구열기’는 과연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국가대표팀 경기에만 치우치지 않고 자국리그, 타국리그 할 것 없이 전방위로 뻗쳐있는 그네들의 축구에 대한 막대한 관심은 이미 수년 전 월드컵을 치른 한국에서 찾아온 이방인의 부러움을 사기에 충분했고 심지어 이토록 축구를 원하는 땅에서 월드컵이 열려야 한다는 확신까지 들게 할 정도였다. 아시안컵 AD카드를 목에 걸고 자카르타 시내를 거닐 때면 자신이 지지하는 국내외 클럽팀을 밝히며 친근하게 축구이야기를 화두로 먼저 말을 걸어오는 이들이 부지기수였다. 늘어선 신문가판은 물론, 거리의 많은 잡화점에서도 아시안컵 속보와 여름 유럽리그 이적정보가 상세하게 실린 인도네시아 제1의 축구전문지 ‘Bola’ 최신호가 절찬리에 판매되고 있었다.

인도네시아의 축구리그 시스템은 잉글랜드의 그것만큼이나 복잡하다. 다만 정리가 되지 않았을 뿐이다. 조금 바꾸어 말하면, 탄탄한 축구리그 시스템으로 가기 위한 밑천인 축구클럽의 풀(Pool)이 충만하기 때문에 체계적으로 리그시스템을 조직해 볼만한 여지가 있다는 뜻도 된다. 상위하위리그 개념을 정립해 승강제를 정례화 하는 등 다양한 운영의 묘가 산다면 축구의 인기를 더욱 증폭시키는 것은 시간문제다. 총 5개의 레벨(1부~5부)로 구성된 인도네시아의 축구리그체계 ‘리가 인도네시아(Liga Indonesia)’가 승강제를 도입한 것은 이미 오래 전 일이다. 축구의 열기는 날로 더해갔고 급기야 30개를 넘나드는 팀이 1부 리그에서 동, 서 조로 나뉘어 비좁게 옥신각신 우승을 다투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이와 같은 난잡한 형태를 개선코자 1990년대 중반 이후 수시로 리그시스템을 바꾸어 보았지만 쉽게 안정을 찾지 못했다. 그러던 2008-2009시즌 18개의 팀으로 구성된 새로운 최상위 리그 ‘ISL(Indonesia Super League)’이 출범하면서 어느 정도 정리가 됐다.

2009-2010시즌 ISL참가 팀 중 가장 큰 규모의 홈구장 ‘겔로라 붕 카르노’를 사용하는 주인공은 서포터 등록 회원수 만 5만 명이 넘고 연간 동원하는 홈 관중수가 무려 평균 3만5천명에 육박하는 인기클럽 ‘페르시자 자카르타(Persija Jakarta)’다. 대형 고급 쇼핑센터가 즐비한 자카르타의 번화한 시내 세나얀에 위치하며 8만 8천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인도네시아 최대의 경기장 ‘겔로라 붕 카르노’는 이 나라의 내셔널 스타디움이기도 하다. 바로 2007년 아시안컵이 펼쳐졌던 주무대였다. 또한 ‘겔로라 붕 카르노’는 FIFA에 2022년 월드컵 유치 의향을 밝힌 인도네시아가 떳떳하게 내세우는 개최예정 경기장 중 월드컵 자격요건에 가장 가까운 시설이기도 하다. 게다가 경기장 시설 내부에는 인도네시아 축구협회가 자리해 행정의 기능까지 보듬고 있으니 명실상부 ‘인도네시아 축구의 본거지’라 일컫는데 손색이 없다.

2008-2009시즌 ISL 챔피언 ‘페르시푸라 자야푸라(Persipura Jayapura)’의 연고지는 인도네시아 영토 동쪽 끝인 뉴기니 섬 파푸아주(2002년 이전에는 이리안자야주라 불렸음)의 주도인 ‘자야푸라’다. 그런데 이 팀은 리그 패자 자격으로 2010 AFC 아시아 챔피언스리그에 참가하면서 국외 클럽을 맞이해 본래 홈구장이 아닌, 멀리 자바섬 자카르타의 ‘겔로라 붕 카르노’에서 경기를 갖기로 결정했다. 이는 국제대회를 치르기에 장해가 되는 팀 연고의 지역적 편재성과 본래 홈 경기장 시설의 열악함에 대한 보완책이며 원정팀에 대한 배려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맞물려, ‘겔로라 붕 카르노’가 지닌 인도네시아 대표 경기장으로서의 대내외적인 상징성이 반영된 결과라고 할 만 하다.

1960년 첫 삽을 뜬 이래 2년여의 공사기간을 거쳐 완공된 ‘겔로라 붕 카르노(Gelora Bung Karno)’는 1962년 자카르타 아시안게임을 치르기 위한 주경기장의 임무를 띠고 태어났다. 경기장의 통칭은 지역의 이름을 딴 ‘겔로라 세나얀’이나 겔로라 붕 카르노’가 정식 경기장 명이다. 네덜란드 식민통치를 벗어나 독립을 쟁취한 인도네시아를 이끌었던 첫 대통령 수카르노의 이름을 따 붙였다. ‘Gelora’는 포괄적으로 ‘스포츠 스타디움’을 의미하는데 공교롭게도 현재 인도네시아어(Bahasa Indonesia)와 같이 말레이어 방언계열에 속하는 언어들에서는 열정(enthusiasm)이란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주로 축구경기가 치러지는 이곳 경기장, ‘Gelora’는 인도네시아 사람들의 크나큰 축구열정으로 적셔진 ‘붕 카르노’를 지칭하는데 더 없이 좋은 단어다. ‘열정’에서 ‘스포츠 스타디움’으로 낱말의 함의범위가 파생돼 나가는 과정에 축구가 매개됐을 가능성은 조금 희박하지만, 미약한 연결고리를 억측해 보는 것만으로도 흥미로운 상상이 된다.

‘붕(Bung)’은 다양하게 번역될 가능성이 있지만 위와 같은 명명의 쓰임에서는 우리말의 ‘형’, ‘형님’에 가장 어울리는 어휘다. 손윗사람을 가리키는 가장 친근한 호칭인데, 정치인(설사 존경과 추앙을 받는 인물일 지라도) 수카르노의 이름을 수식해 자칫 권위주의 시대의 산물로나 치부될 법한 경기장의 네이밍을 옛 향수를 자극하는 정감 어린 애칭으로 변모시켰다. 후대에 지어진 건물에 그 업적을 기리기 위해 역사적 인물의 이름을 붙이는 일은 우리 주변에도 드물지 않다. 천안의 ‘유관순 체육관’이 대표적인 예이다. 만약 체면의 형식을 잠시 벗어 던지고 ‘유관순 누나 체육관’이라 공식 명명 됐다면 ‘수카르노 형님 경기장’만큼이나 살가운 이름으로 다가오지 않았을까.

자카르타에 ‘겔로라 붕 카르노’가 모습을 드러낸 때와 유사한 시기 일본 도쿄 센다가야에는 ‘국립경기장’이 지어졌다. 각각 1962년 아시안게임과 1964년 올림픽을 치르기 위해 신축됐는데 올림픽에 비해 대회의 비중이나 중요도가 한참이나 떨어지는 아시안게임이라지만 적어도 주경기장의 전반적인 위용만큼은 올림픽의 것에 조금도 뒤지지 않았다. 오히려 규모와 일부 시설에선 능가하는 측면도 있었다. 2007년 아시안컵을 앞두고 경기장을 재정비하면서 8만8천여 좌석 규모로 다이어트하기 전까지 ‘겔로라 붕 카르노’의 수용인원은 입석을 포함해 12만 명 선 이었다. 참고로 일본 도쿄 ‘국립경기장’에 한꺼번에 자리할 수 있는 인원은 기껏해야 6만 명이 불과하다. 물론 도쿄 ‘국립경기장’급의 시설이면 올림픽이라는 큰 대회를 치르는데 무리가 없기는 하지만. ‘겔로라 붕 카르노’의 덩치에는 일부 과장된 측면이 없지 않아 보이는데 ‘집회와 선동’을 중시했던 권위주의시대의 정치적 의도가 초기 경기장 건설에 보다 많이 반영 된 결과인 듯하다.

비슷한 시기 다른 나라에 지어진 옥외 종합경기장과 비교해 보았을 때 ‘겔로라 붕 카르노’가 지니는 또 하나의 큰 특징은 신축 당시부터 경기장을 빙 두르며 관중석의 대부분을 덮는 지붕이 설치되었다는 점이다. ‘겔로라 붕 카르노’만큼 혹은 더 오랜 역사를 지닌 세계 곳곳의 경기장 중에 현재 지붕을 소유한 것들은 많지만 비교적 최근에 이루어진 개축과정에서 지붕을 증설한 경우가 대다수이다. ‘이른 시기 지붕’의 존재는 인도네시아, 좁게는 자바섬에 위치한 자카르타의 기후와 관련이 있다. 쾨펜의 기후분류를 따르자면 자카르타는 ‘열대 습윤 및 건조기후’에 속한다. 자카르타는 1년 내내 월평균 최고기온이 32도에 육박하고, 늘 습하며, 건기와 우기가 나뉘어져 있다. 하지만 장마와 태풍의 영향으로 특정계절에 강수가 집중되는 우리나라와는 달리 연중 비교적 고르게 비가 내리는 편이다. 연평균 강수량을 비교해 보아도 자카르타의 것이 서울의 것을 앞지른다. 10만 명 전후의 인원이 좁디좁은 경기장 스탠드를 메워야 하는 악조건 속에서 작렬하는 태양의 빛을 막아주고 그늘을 생산해낼 잠재능력을 지니고 있으며 비 또한 방어해낼 수 있는 지붕의 설치는 전 세계적으로도 경기장에 지붕이 드물던 시절, 즉 1960년대 초반이었음에도 자카르타에 새로 짓는 거대한 경기장 설계과정에서 가장 우선 고려되었던 사항이었음이 분명하다.

원형경기장의 외면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늘어선 12개의 출입구가 있다. 각 출입구는 로마자로 숫자가 표기돼있는데 I번과 XII번 출입구가 접해 붙은 사이에 VIP가 드나드는 웅장한 본부석 게이트가 별도로 존재한다. 경기장에서 제법 멀리 떨어진 외곽경계로부터 VIP문까지 폭이 족히 50미터는 넘어 보이는 길고 넓은 길이 나있다. 축구의 본거지로 향하는 거창한 통로에는 그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거대한 조형물이 있다. 이른바 ‘활 쏘는 라마(Rama archer)’상이다. 라마는 고대 인도 산스크리트 2대 서사시 중 ‘라마야나’의 주인공으로 활을 능히 다루었다. 온갖 나쁜 짓을 일삼으며 천계의 질서를 어지럽힌 악마왕 라바나를 죽인 영웅이 바로 그다. 힌두교에서는 우주를 유지하고 또 보존하는 비쉬누신을 믿는데 라마는 비쉬누의 일곱 번째 화신으로 섬겨지는 존재다. 이 용맹한 화신이 인도네시아 축구의 본거지를 수호하는 형상이다. 이슬람의 나라 인도네시아에서 인도 서사시의 등장인물이자 힌두교 신이 ‘수호자’의 상을 하고 내셔널 스타디움을 보위하고 있다는 사실에 잠시 고개를 갸우뚱할지도 모른다.

최근 통계에 따르면 17000개가 넘는 섬으로 구성된 인도네시아의 인구는 무려 2억 4천여 만 명에 달한다. 국민의 88%가 무슬림으로 신도 수로만 따지면 세계 최대의 이슬람 국가가 바로 인도네시아다. 이슬람교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중동지역은 뿔뿔이 소국으로 쪼개진 까닭에 개별 국가의 무슬림 수로 따지면 인도네시아의 그것에 근접하지도 못한다. 이슬람의 본산인 사우디아라비아의 모든 국민이 무슬림이라고 쳐도 총 국민수인 2천8백만 명을 넘을 수 없다. 무슬림 상인들에 의해 이슬람교가 본격적으로 전파되기 전에는 종교와 사상을 중심으로 인도로부터 유래된 문화가 ‘이슬람의 땅’ 인도네시아에 지배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수마트라 섬에서는 불교가, 자바 섬에서는 힌두교가 융성한 적도 있다. 인도문화는 점차 현지 인도네시아의 사정과 여건에 맞게 토착화돼 갔다. 이 과정에서 ‘라마’의 이야기 또한 인도네시아의 신화로 적절히 변용되어 흡습되었으며 이는 이슬람교가 들어와 득세를 하고서도 변치 않을 만큼 현지화, 고착화된 스토리였다. 이리하여 ‘활 쏘는 라마’는 이국인이 아닌 인도네시아 신화 속의 영웅자격으로 내셔널 스타디움을 지키게 된 것이다.

라마가 수호하는 인도네시아 축구의 본거지 ‘겔로라 붕 카르노’를 마지막으로 방문한 때는 2007 아시안컵 결승전이 열리는 날이었다. 축구 그 자체에 열광하는 6만여 팬들이 운집해 돌풍의 핵 이라크가 기어코 아시안 컵을 거머쥐는 기적을 지켜보았고, 나는 피치가 아닌 열기 가득한 관중석을 부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지난해 12월 초의 기억이다. 남아공 월드컵 조추첨이 거행된 다음날 아침, 케이프타운 국제 컨벤션 센터에서 열렸던 세계미디어총회에 참석했다. 2010년 월드컵의 제반 사항에 대한 각종 미디어 프리젠테이션이 진행됐고 행사말미에 질의응답 순서가 이어졌다. 가장 먼저 손을 들어 FIFA 미디어관련 최고책임자에게 힐문했던 이는 인도네시아 ‘Bola’지의 사진기자 ‘보비’였다.

“축구는 인도네시아 최고인기 스포츠이며, 2억 4천만 국민들의 삶 그 자체이다. 안타깝게도 아시아 지역예선에서 탈락한 인도네시는 월드컵에 참가하지 못한다. 그래도 축구 그대로를 사랑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6개월여 앞으로 다가온 2010 월드컵 개막을 벌써부터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월드컵 취재증이 월드컵 본선 참가국 기자들에게만 편중되어 배분되기 때문에 우리 인도네시아 기자들이 취재증을 받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인도네시아 제1의 축구전문지인 우리 ‘Bola’도 단 1장의 취재 쿼터를 받을 수 있을지 불확실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욕구를 충족시킬 만큼의 현장기사를 생산해낼 수 있도록 인도네시아분의 취재증 쿼터 수를 늘려 달라!”

자리에 참석한 미디어 관계자 모두들 월드컵 취재증 배분문제에 민감해 있던 때라 일시에 행사장의 분위기가 냉랭해졌다. ‘보비’를 매체이기주의자로 낙인찍으려는 듯 콧방귀를 뀌는 벽안의 기자들도 더러는 있었다.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를 보이는 몇몇 참석자들은 아마 8만8천명이 축구에 대한 ‘광기’를 열정적으로 뿜어내는 ‘겔로라 붕 카르노’를 몸소 체험해 본 바 있는 이들 뿐이었을 것이다.

글,사진=양정훈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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